'좋아하는 시'에 해당되는 글 6

  1. 2016.01.04 스미다 -이병률- 1
  2. 2015.03.17 따뜻한 얼음 - 박남준 -
  3. 2014.10.30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4. 2014.10.27 여승(女僧) -백석- 1
  5. 2014.10.23 사평역에서 -곽재구-
  6. 2014.05.26 오분간 -나희덕- 2

스미다 -이병률-

2016. 1. 4. 00:29 | Posted by 도유정

스미다

-이병률-



새벽이 되어 지도를 들추다가

울진이라는 지명에 울컥하여 차를 몬다

울진에 도착하니 밥냄새와 나란히 해가 뜨고

나무가 울창하여 울진이 됐다는 어부의 말에

참 이름도 잘 지었구나 싶어 또 울컥

해변 식당에서 아침밥을 시켜 먹으며

찌개냄비에서 생선뼈를 건져내다 또다시

왈칵 눈물이 치솟는 것은 무슨 설움 때문일까

탕이 매워서 그래요? 식당 주인이 묻지만

눈가에 휴지를 대고 후룩후룩 국물을 떠먹다

대답 대신 소주 한 병을 시킨 건 다 설움이 매워서다

바닷가 여관에서 몇 시간을 자고

얼굴에 내려앉는 붉은 기운에 창을 여니

해 지는 여관 뒤편 누군가 끌어다 놓은 배 위에 올라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한 사내

해바라기 숲을 등지고 서럽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한 사내

내 설움은 저만도 못해서

내 눈알은 저만한 솜씨도 못 되어서 늘 찔끔하고 마는데

그가 올라앉은 뱃전을 적시던 물기가

내가 올라와 있는 이층 방까지 스며들고 있다

한 몇 달쯤 흠뻑 앉아 있지 않고

자전거를 끌고 돌아가는 사내의 집채만한 그림자가

찬물처럼 내 가슴에 스미고 있다








이병률 시인의 <스미다>는 늘 내 마음 한 구석에 스며있는 시다. 사실 스미다 라는 제목보다는 자꾸만 울진......으로 기억이 나서 검색할 때마다 이병률 울진, 이라고 쓰게 된다. 울진, 울다, 설움...... 이런 단어로 연상이 되는 시라서 그런가.


울진이라는 지명에 울컥해서 무작정 차를 몰고가고, 나무가 울창해서 울진이 됐다는 어부의 말에 또 울컥, 홀로 매운탕을 시켜먹다 왈칵 눈물이 나는 설움...... 그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내어 우는 어떤 사내를 보며 내 설움은 저만도 못해서 찔끔 나고 마는 눈물...... 이런 시구가 꼭 소리내어 울지 못하는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처럼 내 가슴에 스미어 있다.


소리내서 크게 울어본 지가 오래된 것 같다. 누군가 들을까 두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까지 참고 또 참다가 겨우 몇 방울 주르륵 흘려내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덤덤해져서. 그런 날이면 늘 내 설움은 저만도 못해서...... 라는 시구와, 노을이 내려앉는 바닷가의 뱃전에 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엉엉 우는 남자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곤 한다.


읽을 때마다 가슴 속에 한 방울씩 내려앉으며 위로가 되는 시.


 




※ 사진출처

1) 3pdgourmet.tistory.com

2) www.sun1947.com


'좋아하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따뜻한 얼음 - 박남준 -  (0) 2015.03.17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0) 2014.10.30
여승(女僧) -백석-  (1) 2014.10.27
사평역에서 -곽재구-  (0) 2014.10.23
오분간 -나희덕-  (2) 2014.05.26

따뜻한 얼음 - 박남준 -

2015. 3. 17. 10:29 | Posted by 도유정

따뜻한 얼음


박남준

   

 

옷을 껴입듯 한겹 또 한겹

추위가 더할수록 얼음의 두께가 깊어지는 것은

버들치며 송사리 품 안에 숨 쉬는 것들을

따뜻하게 키우고 싶기 때문이다

철모르는 돌팔매로부터

겁 많은 물고기들을 두 눈 동그란 것들을

놀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얼음이 맑고 반짝이는 것은

그 아래 작고 여린 것들이 푸른빛을 잃지 않고

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겨울 모진 것 그래도 견딜 만한 것은

제 몸의 온기란 온기 세상에 다 전하고

스스로 차디찬 알몸의 몸이 되어버린 얼음이 있기 때문이다

쫓기고 내몰린 것들을 껴안고 눈물지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햇살 아래 녹아버린 얼음의 투명한 눈물자위를

아 몸을 다 바쳐서 피워내는 사랑이라니

그 빛나는 것이라니

   

   

출처 : 박남준 시집적막



사진 출처 : https://ggtour.or.kr/wp-content/uploads/2012/01/pocheon_595.jpg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오는 시, <따뜻한 얼음>.


겨울이 다가오면서 날이 점점 추워지면, 계곡에 살얼음이 하나씩 끼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신기하기도 하고 장난삼아 얼음이 깨지나 안 깨지나 보려고 돌을 던져봤던 기억이 난다.


시인은 그러한 '철 모르는 돌팔매'로부터 겁 많은 물고기들을 보호하기 위해, 얼음이 한 겹 한 겹 옷을 껴입듯 두꺼워진다고 말을 한다.  

그렇게 두꺼워진 얼음이 햇빛에 반짝이는 것은 얼음 아래에 있는 작고 여린 것들이 푸른 빛을 잃지 않고 봄을 기다리기 때문이고, 얼음이 제 몸의 온기란 온기는 모두 그 여린 것들에게 줘버리고 그 스스로는 차디찬 얼음이 되었다고 말한다.


날이 따뜻해지면서 녹은 얼음의 자취를, 시인은 쫓기고 내몰린 것들을 품어 눈물지은 자국이라고 표현을 한다.

첫번째 연과 두번째 연에서 계곡가에 낀 얼음을 대상으로 '따뜻한 상상'을 펼쳤다면, 마지막 세번째 연에서 시인의 시선은 우리 삶으로 옮겨오며 '여린 것들을 감싸안아주는 사랑'에 대한 찬사로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나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좋다. 뉴스만 틀면 누가 돈 때문에 누구를 죽였고 뭐를 어떻게 했고 별의별 흉흉한 소식이 전해지지만, 그 중에서도 '아직 우리 사회는 그래도 살 만하구나' 감동하게 만드는 작은 선행이 있다.


삶이 팍팍해질수록 사회에 대한 냉소와 회의가 들불처럼 번지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희망과 사랑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사랑이니까. 내 온기를 다 주어서라도 쫓기고 내몰린 것들을 품어주는 그 따뜻함이니까.




'좋아하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미다 -이병률-  (1) 2016.01.04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0) 2014.10.30
여승(女僧) -백석-  (1) 2014.10.27
사평역에서 -곽재구-  (0) 2014.10.23
오분간 -나희덕-  (2) 2014.05.26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2014. 10. 30. 14:11 | Posted by 도유정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 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 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









눈빛이 형형히 살아있는 김수영 시인의 사진. 민음사에서 나온 <거대한 뿌리>라는 김수영 시인의 시선을 가지고 있는데, 연보에 따르면 1921년 출생하여 1968년 귀가 중 버스에 치여 다음날 아침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의 시에는 거대한 시대의 부조리 앞에 절망하는 소시민의 비애감과 좌절감, 그럼에도 읽는 사람의 피마저 들끓게 만드는 자유에의 갈망이 살아 숨쉰다. 말이 거창하긴 하지만, 나는 김수영 시인의 시를 읽으며 한편으로는 입맛이 쓰면서도 한편으로는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어떤 감정을 느끼곤 했다.


나는 민중시를 좋아한다. 내가 현실을 살아가며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애써 모른 척하고 묻어 둔 수많은 부조리와 억압을 문학은 낱낱이 고발하며 시대의 변화를 촉구한다. 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한 사람 두 사람의 결심이 모여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들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된다. 낙수가 거대한 바위를 뚫듯......


이 시에서 시인은 이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지 못하면서 힘 없는 자들에게, 하찮은 생활에서 사소한 분노를  느끼는 자신을 한탄하고 비판한다. 시의 화자도 자신이 비겁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 감히 세상에 맞서 싸우지 못하는 자신을 모래에 비유하면서, 바람, 먼지, 풀이라 말하며 내가 얼마큼 작으냐고 절절이 외친다.


양극화의 심화, 늘어나는 청년 실업률, 아직도 좌초되고 있는 억울한 부모들의 마음, 수많은 계약직의 암담한 미래, 민영화 위기에 놓인 의료 서비스...... 수많은 사회 문제와 부조리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위협하고 있는데도 나는 오른 관리비에 분노하고 빵 값이 비싸다며 투덜댄다. 가끔 내 불평불만이 얼마나 하찮고 사소한지 깨달을 때마다 나는 김수영 시인의 시를 떠올린다. 나는 얼마큼 작으냐.......

'좋아하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미다 -이병률-  (1) 2016.01.04
따뜻한 얼음 - 박남준 -  (0) 2015.03.17
여승(女僧) -백석-  (1) 2014.10.27
사평역에서 -곽재구-  (0) 2014.10.23
오분간 -나희덕-  (2) 2014.05.26

여승(女僧) -백석-

2014. 10. 27. 22:07 | Posted by 도유정


여 승(女僧)

백 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山)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사슴>(1936)-
 







읽을 때마다 서러워지는 시가 있다. 이용악의 <낡은 집>, 박목월의 <하관>, 김종삼의 <민간인>...... 그리고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백석 시인의 <여승> 역시 시구 한 줄 한 줄에 서러움이 점점이 묻어있어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난다.


이 시의 화자는 여승이 아니다. 오히려 화자는 관찰자에 가깝다. 평안도의 어느 깊은 산을 걷다, 화자는 어느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사연이 많아 보이던 여인의 옆에는 나이 어린 딸이 칭얼대며 보채고 있었고, 여인은 그런 딸 아이를 때리며 추웠던 가을밤 날씨만큼이나 차게 울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화자는 비구니가 된 여인을 만나게 된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은' 여인을 바라보며, 화자는 불경처럼 서러움을 느낀다.


여인의 몸, 그것도 한 때 남편과 자식까지 딸려있던 몸으로 산사로 출가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풍파와 곡절을 겪었을까. 화자는 여인이 겪었을 말 못할 고통을 일일이 서술하지 않는다. 남편은 10년째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어린 딸은 죽어 도라지 꽃이 만개한 돌무덤에 묻혔다.


누구도 여인이 홀로 겪었을 고통을 알지 못한다. 어느 산절 마당에서 여인의 한 많은 눈물이 잘려나가는 머리카락과 함께 뚝뚝 떨어진 날이 있음을, 함께 울었던 산꿩만이 알 뿐이다.


고즈넉한 산에서 세속의 한과 설움을 가슴에 묻으며, 가지취 내음이 몸에 배기까지 그 오랜 시간 여인의 낯은 옛날같이 늙었다. 그러나 출가를 했어도 여인의 삶이 결코 행복하지 않음을 우리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는 화자의 느낌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여인의 낯은 여전히 쓸쓸했고 화자는 서러웠다.


이 시는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하던 1930년대에 쓰였다. 일본은 31년 만주침략 이후 대륙침략전쟁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표현했으며 조선의 미곡, 면화, 누에고치, 인력을 본격적으로 착취했다. 수많은 조선의 가장이 전쟁터나 광산에 끌려가 죽음을 맞고 남겨진 수많은 가족들이 궁핍함에 고통받았을 것이다.

오늘 내가 따뜻한 집에서 배불리 저녁밥을 먹고 이 글을 쓰는 데에는 선조들의 고통과 희생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지. 우리의 아픈 역사를 잊지 말아야지.






'좋아하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미다 -이병률-  (1) 2016.01.04
따뜻한 얼음 - 박남준 -  (0) 2015.03.17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0) 2014.10.30
사평역에서 -곽재구-  (0) 2014.10.23
오분간 -나희덕-  (2) 2014.05.26

사평역에서 -곽재구-

2014. 10. 23. 16:14 | Posted by 도유정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장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 중 하나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문학을 제일 좋아했는데, 문학 책에 나오는 현대시와 소설이 너무 좋아 문제집을 풀 때마다 다이어리에 시 전문과 소설 구절을 옮겨 적었었다. 문학 과목이야말로 정말 좋아해서, 즐기면서 공부했던 과목이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이 시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내 마음에 뭔가가 덜컥 내려앉았다. 평범한 단어와 문장인데도 시에 나의 마음과 정신을 확 묶어놓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대합실 차창 밖으로는 소리없이 눈송이가 쌓이고, 승객들은 침묵 속에서 말 없이 기차를 기다린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한줌의 톱밥을 불꽃 속에 적셔두고'....... 이 표현에서 내 마음 역시 시에 젖어들어갔던 것 같다.


시의 화자는 난로에 톱밥을 던져 넣으며 그리웠던 순간들을 돌이켜 본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를 인생 속에서 어차피 낯설음도 뼈 아픈 추억과 고통도 다 설원인데......


산다는 것은 때로 귀향하는 기분으로 저마다 손에 들린 것을 만지작거리며 침묵해야 한다는 것은, 나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가끔 침묵이 열 마디의 말보다 낫다는 것은 요즘들어 조금씩 느끼고 있다.



월요일 화요일 지겹게 내리던 비가 그치고 어느덧 늦가을로 접어들고 있다. 이제 몇 번 더 가을비가 내리면 겨울이 올 것이다. 내 삶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르지만 부끄럽지 않게 살았으면 좋겠다. 나 자신에게 떳떳하도록...... 



'좋아하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미다 -이병률-  (1) 2016.01.04
따뜻한 얼음 - 박남준 -  (0) 2015.03.17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0) 2014.10.30
여승(女僧) -백석-  (1) 2014.10.27
오분간 -나희덕-  (2) 2014.05.26

오분간 -나희덕-

2014. 5. 26. 23:28 | Posted by 도유정

오분간

 

나희덕

 


이 꽃그늘 아래서

내 일생이 다 지나갈 것 같다.

기다리면서 서성거리면서

아니, 이미 다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기다리는 오분간

아카시아꽃 하얗게 흩날리는

이 그늘 아래서

어느새 나는 머리 희끗한 노파가 되고,

버스가 저 모퉁이를 돌아서

내 앞에 멈추면

여섯살배기가 뛰어내려 안기는 게 아니라

훤칠한 청년 하나 내게로 걸어올 것만 같다.

내가 늙은 만큼 그는 자라서

서로의 삶을 맞바꾼 듯 마주보겠지.

기다림 하나로도 깜박 지나가 버릴 生,

내가 늘 기다렸던 이 자리에

그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쯤

너무 멀리 나가버린 그의 썰물을 향해

떨어지는 꽃잎,

또는 지나치는 버스를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내 기다림을 완성하겠지.

중얼거리는 동안 꽃잎은 한 무더기 또 진다.

아, 저기 버스가 온다.

나는 훌쩍 날아올라 꽃그늘을 벗어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 중 한 분인 나희덕 시인의 수작이다.

 

사실 시에서는 아카시아 꽃이라고 썼지만, 봄이라서 그런가 나는 읽으면서 벚꽃잎이 봄바람에 흩날려 비처럼 사붓사붓 떨어지는 풍경을 생각했었다.

 

 

 

이렇게 길 양 옆으로 화사하게 만개한 벚꽃이 봄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고, 유치원 간 아이가 타고 올 통학버스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엄마 옆으로 벚꽃잎이 분분히 흩날리는, 아름다운 봄의 한 장면이 마치 사진처럼 내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버스가 오기까지 그 찰나의 시간을, 여섯살 아이가 스무살 청년으로 훌쩍 자라버리는 시간으로 대치한 발상이 너무나 훌륭하다. 나는 아직 아이를 길러보지 않아 잘 모르지만 어머니들은 아이들 자라는 게 정말 금방이라고들 하시더라. 다섯살 여섯살이 엊그제같은데 벌써 교복을 입고 대학에 가고 결혼을 한다고.

 

버스에서 내린 아이가 스무살 훤칠한 청년이 되어 '나'와 마주본다는 시구가 너무 좋았다. '내가 늙은만큼 그는 자라서 서로의 삶을 맞바꾼 듯 마주보겠지.'

나는 내가 자라는 데에만 급급해서 우리 부모님이 나이 드시는 건 생각하지 못했다. 눈 앞에 닥친 학업과 시험, 친구관계에 열중하면서 대학에 가고 졸업을 하는 동안 숱 많던 우리 아빠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듬성듬성 비어있고, 우리 엄마의 머리는 희끝희끝해져 있더라... 내가 크는 만큼 우리 부모님도 어느새 서른, 마흔이 되고 쉰을 넘기시는 것을 곁에 있으면서도 몰랐다.

 

기다림 하나로도 깜빡 지나가 버린 우리 부모님의 생. 그동안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너무 멀리 빠져버린 내 썰물의 빈자리를, 이제 다시 채워야겠다. 내게 준 것보다 더 큰 사랑으로 다시 밀려들 시간이다.  

 

 

 

'좋아하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미다 -이병률-  (1) 2016.01.04
따뜻한 얼음 - 박남준 -  (0) 2015.03.17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0) 2014.10.30
여승(女僧) -백석-  (1) 2014.10.27
사평역에서 -곽재구-  (0) 2014.10.23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