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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4.10.23 사평역에서 -곽재구-

여승(女僧) -백석-

2014. 10. 27. 22:07 | Posted by 도유정


여 승(女僧)

백 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山)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사슴>(1936)-
 







읽을 때마다 서러워지는 시가 있다. 이용악의 <낡은 집>, 박목월의 <하관>, 김종삼의 <민간인>...... 그리고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백석 시인의 <여승> 역시 시구 한 줄 한 줄에 서러움이 점점이 묻어있어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난다.


이 시의 화자는 여승이 아니다. 오히려 화자는 관찰자에 가깝다. 평안도의 어느 깊은 산을 걷다, 화자는 어느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사연이 많아 보이던 여인의 옆에는 나이 어린 딸이 칭얼대며 보채고 있었고, 여인은 그런 딸 아이를 때리며 추웠던 가을밤 날씨만큼이나 차게 울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화자는 비구니가 된 여인을 만나게 된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은' 여인을 바라보며, 화자는 불경처럼 서러움을 느낀다.


여인의 몸, 그것도 한 때 남편과 자식까지 딸려있던 몸으로 산사로 출가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풍파와 곡절을 겪었을까. 화자는 여인이 겪었을 말 못할 고통을 일일이 서술하지 않는다. 남편은 10년째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어린 딸은 죽어 도라지 꽃이 만개한 돌무덤에 묻혔다.


누구도 여인이 홀로 겪었을 고통을 알지 못한다. 어느 산절 마당에서 여인의 한 많은 눈물이 잘려나가는 머리카락과 함께 뚝뚝 떨어진 날이 있음을, 함께 울었던 산꿩만이 알 뿐이다.


고즈넉한 산에서 세속의 한과 설움을 가슴에 묻으며, 가지취 내음이 몸에 배기까지 그 오랜 시간 여인의 낯은 옛날같이 늙었다. 그러나 출가를 했어도 여인의 삶이 결코 행복하지 않음을 우리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는 화자의 느낌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여인의 낯은 여전히 쓸쓸했고 화자는 서러웠다.


이 시는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하던 1930년대에 쓰였다. 일본은 31년 만주침략 이후 대륙침략전쟁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표현했으며 조선의 미곡, 면화, 누에고치, 인력을 본격적으로 착취했다. 수많은 조선의 가장이 전쟁터나 광산에 끌려가 죽음을 맞고 남겨진 수많은 가족들이 궁핍함에 고통받았을 것이다.

오늘 내가 따뜻한 집에서 배불리 저녁밥을 먹고 이 글을 쓰는 데에는 선조들의 고통과 희생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지. 우리의 아픈 역사를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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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역에서 -곽재구-

2014. 10. 23. 16:14 | Posted by 도유정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장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 중 하나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문학을 제일 좋아했는데, 문학 책에 나오는 현대시와 소설이 너무 좋아 문제집을 풀 때마다 다이어리에 시 전문과 소설 구절을 옮겨 적었었다. 문학 과목이야말로 정말 좋아해서, 즐기면서 공부했던 과목이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이 시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내 마음에 뭔가가 덜컥 내려앉았다. 평범한 단어와 문장인데도 시에 나의 마음과 정신을 확 묶어놓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대합실 차창 밖으로는 소리없이 눈송이가 쌓이고, 승객들은 침묵 속에서 말 없이 기차를 기다린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한줌의 톱밥을 불꽃 속에 적셔두고'....... 이 표현에서 내 마음 역시 시에 젖어들어갔던 것 같다.


시의 화자는 난로에 톱밥을 던져 넣으며 그리웠던 순간들을 돌이켜 본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를 인생 속에서 어차피 낯설음도 뼈 아픈 추억과 고통도 다 설원인데......


산다는 것은 때로 귀향하는 기분으로 저마다 손에 들린 것을 만지작거리며 침묵해야 한다는 것은, 나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가끔 침묵이 열 마디의 말보다 낫다는 것은 요즘들어 조금씩 느끼고 있다.



월요일 화요일 지겹게 내리던 비가 그치고 어느덧 늦가을로 접어들고 있다. 이제 몇 번 더 가을비가 내리면 겨울이 올 것이다. 내 삶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르지만 부끄럽지 않게 살았으면 좋겠다. 나 자신에게 떳떳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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