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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역에서 -곽재구-

2014. 10. 23. 16:14 | Posted by 도유정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장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 중 하나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문학을 제일 좋아했는데, 문학 책에 나오는 현대시와 소설이 너무 좋아 문제집을 풀 때마다 다이어리에 시 전문과 소설 구절을 옮겨 적었었다. 문학 과목이야말로 정말 좋아해서, 즐기면서 공부했던 과목이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이 시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내 마음에 뭔가가 덜컥 내려앉았다. 평범한 단어와 문장인데도 시에 나의 마음과 정신을 확 묶어놓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대합실 차창 밖으로는 소리없이 눈송이가 쌓이고, 승객들은 침묵 속에서 말 없이 기차를 기다린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한줌의 톱밥을 불꽃 속에 적셔두고'....... 이 표현에서 내 마음 역시 시에 젖어들어갔던 것 같다.


시의 화자는 난로에 톱밥을 던져 넣으며 그리웠던 순간들을 돌이켜 본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를 인생 속에서 어차피 낯설음도 뼈 아픈 추억과 고통도 다 설원인데......


산다는 것은 때로 귀향하는 기분으로 저마다 손에 들린 것을 만지작거리며 침묵해야 한다는 것은, 나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가끔 침묵이 열 마디의 말보다 낫다는 것은 요즘들어 조금씩 느끼고 있다.



월요일 화요일 지겹게 내리던 비가 그치고 어느덧 늦가을로 접어들고 있다. 이제 몇 번 더 가을비가 내리면 겨울이 올 것이다. 내 삶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르지만 부끄럽지 않게 살았으면 좋겠다. 나 자신에게 떳떳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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