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추천'에 해당되는 글 2

  1. 2016.01.04 스미다 -이병률- 1
  2. 2014.10.27 여승(女僧) -백석- 1

스미다 -이병률-

2016. 1. 4. 00:29 | Posted by 도유정

스미다

-이병률-



새벽이 되어 지도를 들추다가

울진이라는 지명에 울컥하여 차를 몬다

울진에 도착하니 밥냄새와 나란히 해가 뜨고

나무가 울창하여 울진이 됐다는 어부의 말에

참 이름도 잘 지었구나 싶어 또 울컥

해변 식당에서 아침밥을 시켜 먹으며

찌개냄비에서 생선뼈를 건져내다 또다시

왈칵 눈물이 치솟는 것은 무슨 설움 때문일까

탕이 매워서 그래요? 식당 주인이 묻지만

눈가에 휴지를 대고 후룩후룩 국물을 떠먹다

대답 대신 소주 한 병을 시킨 건 다 설움이 매워서다

바닷가 여관에서 몇 시간을 자고

얼굴에 내려앉는 붉은 기운에 창을 여니

해 지는 여관 뒤편 누군가 끌어다 놓은 배 위에 올라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한 사내

해바라기 숲을 등지고 서럽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한 사내

내 설움은 저만도 못해서

내 눈알은 저만한 솜씨도 못 되어서 늘 찔끔하고 마는데

그가 올라앉은 뱃전을 적시던 물기가

내가 올라와 있는 이층 방까지 스며들고 있다

한 몇 달쯤 흠뻑 앉아 있지 않고

자전거를 끌고 돌아가는 사내의 집채만한 그림자가

찬물처럼 내 가슴에 스미고 있다








이병률 시인의 <스미다>는 늘 내 마음 한 구석에 스며있는 시다. 사실 스미다 라는 제목보다는 자꾸만 울진......으로 기억이 나서 검색할 때마다 이병률 울진, 이라고 쓰게 된다. 울진, 울다, 설움...... 이런 단어로 연상이 되는 시라서 그런가.


울진이라는 지명에 울컥해서 무작정 차를 몰고가고, 나무가 울창해서 울진이 됐다는 어부의 말에 또 울컥, 홀로 매운탕을 시켜먹다 왈칵 눈물이 나는 설움...... 그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내어 우는 어떤 사내를 보며 내 설움은 저만도 못해서 찔끔 나고 마는 눈물...... 이런 시구가 꼭 소리내어 울지 못하는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처럼 내 가슴에 스미어 있다.


소리내서 크게 울어본 지가 오래된 것 같다. 누군가 들을까 두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까지 참고 또 참다가 겨우 몇 방울 주르륵 흘려내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덤덤해져서. 그런 날이면 늘 내 설움은 저만도 못해서...... 라는 시구와, 노을이 내려앉는 바닷가의 뱃전에 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엉엉 우는 남자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곤 한다.


읽을 때마다 가슴 속에 한 방울씩 내려앉으며 위로가 되는 시.


 




※ 사진출처

1) 3pdgourmet.tistory.com

2) www.sun1947.com


'좋아하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따뜻한 얼음 - 박남준 -  (0) 2015.03.17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0) 2014.10.30
여승(女僧) -백석-  (1) 2014.10.27
사평역에서 -곽재구-  (0) 2014.10.23
오분간 -나희덕-  (2) 2014.05.26

여승(女僧) -백석-

2014. 10. 27. 22:07 | Posted by 도유정


여 승(女僧)

백 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山)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사슴>(1936)-
 







읽을 때마다 서러워지는 시가 있다. 이용악의 <낡은 집>, 박목월의 <하관>, 김종삼의 <민간인>...... 그리고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백석 시인의 <여승> 역시 시구 한 줄 한 줄에 서러움이 점점이 묻어있어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난다.


이 시의 화자는 여승이 아니다. 오히려 화자는 관찰자에 가깝다. 평안도의 어느 깊은 산을 걷다, 화자는 어느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사연이 많아 보이던 여인의 옆에는 나이 어린 딸이 칭얼대며 보채고 있었고, 여인은 그런 딸 아이를 때리며 추웠던 가을밤 날씨만큼이나 차게 울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화자는 비구니가 된 여인을 만나게 된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은' 여인을 바라보며, 화자는 불경처럼 서러움을 느낀다.


여인의 몸, 그것도 한 때 남편과 자식까지 딸려있던 몸으로 산사로 출가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풍파와 곡절을 겪었을까. 화자는 여인이 겪었을 말 못할 고통을 일일이 서술하지 않는다. 남편은 10년째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어린 딸은 죽어 도라지 꽃이 만개한 돌무덤에 묻혔다.


누구도 여인이 홀로 겪었을 고통을 알지 못한다. 어느 산절 마당에서 여인의 한 많은 눈물이 잘려나가는 머리카락과 함께 뚝뚝 떨어진 날이 있음을, 함께 울었던 산꿩만이 알 뿐이다.


고즈넉한 산에서 세속의 한과 설움을 가슴에 묻으며, 가지취 내음이 몸에 배기까지 그 오랜 시간 여인의 낯은 옛날같이 늙었다. 그러나 출가를 했어도 여인의 삶이 결코 행복하지 않음을 우리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는 화자의 느낌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여인의 낯은 여전히 쓸쓸했고 화자는 서러웠다.


이 시는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하던 1930년대에 쓰였다. 일본은 31년 만주침략 이후 대륙침략전쟁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표현했으며 조선의 미곡, 면화, 누에고치, 인력을 본격적으로 착취했다. 수많은 조선의 가장이 전쟁터나 광산에 끌려가 죽음을 맞고 남겨진 수많은 가족들이 궁핍함에 고통받았을 것이다.

오늘 내가 따뜻한 집에서 배불리 저녁밥을 먹고 이 글을 쓰는 데에는 선조들의 고통과 희생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지. 우리의 아픈 역사를 잊지 말아야지.






'좋아하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미다 -이병률-  (1) 2016.01.04
따뜻한 얼음 - 박남준 -  (0) 2015.03.17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0) 2014.10.30
사평역에서 -곽재구-  (0) 2014.10.23
오분간 -나희덕-  (2) 2014.05.26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