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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2014. 10. 30. 14:11 | Posted by 도유정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 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 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









눈빛이 형형히 살아있는 김수영 시인의 사진. 민음사에서 나온 <거대한 뿌리>라는 김수영 시인의 시선을 가지고 있는데, 연보에 따르면 1921년 출생하여 1968년 귀가 중 버스에 치여 다음날 아침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의 시에는 거대한 시대의 부조리 앞에 절망하는 소시민의 비애감과 좌절감, 그럼에도 읽는 사람의 피마저 들끓게 만드는 자유에의 갈망이 살아 숨쉰다. 말이 거창하긴 하지만, 나는 김수영 시인의 시를 읽으며 한편으로는 입맛이 쓰면서도 한편으로는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어떤 감정을 느끼곤 했다.


나는 민중시를 좋아한다. 내가 현실을 살아가며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애써 모른 척하고 묻어 둔 수많은 부조리와 억압을 문학은 낱낱이 고발하며 시대의 변화를 촉구한다. 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한 사람 두 사람의 결심이 모여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들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된다. 낙수가 거대한 바위를 뚫듯......


이 시에서 시인은 이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지 못하면서 힘 없는 자들에게, 하찮은 생활에서 사소한 분노를  느끼는 자신을 한탄하고 비판한다. 시의 화자도 자신이 비겁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 감히 세상에 맞서 싸우지 못하는 자신을 모래에 비유하면서, 바람, 먼지, 풀이라 말하며 내가 얼마큼 작으냐고 절절이 외친다.


양극화의 심화, 늘어나는 청년 실업률, 아직도 좌초되고 있는 억울한 부모들의 마음, 수많은 계약직의 암담한 미래, 민영화 위기에 놓인 의료 서비스...... 수많은 사회 문제와 부조리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위협하고 있는데도 나는 오른 관리비에 분노하고 빵 값이 비싸다며 투덜댄다. 가끔 내 불평불만이 얼마나 하찮고 사소한지 깨달을 때마다 나는 김수영 시인의 시를 떠올린다. 나는 얼마큼 작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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