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시'에 해당되는 글 2

  1. 2014.10.23 사평역에서 -곽재구-
  2. 2014.05.26 오분간 -나희덕- 2

사평역에서 -곽재구-

2014. 10. 23. 16:14 | Posted by 도유정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장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 중 하나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문학을 제일 좋아했는데, 문학 책에 나오는 현대시와 소설이 너무 좋아 문제집을 풀 때마다 다이어리에 시 전문과 소설 구절을 옮겨 적었었다. 문학 과목이야말로 정말 좋아해서, 즐기면서 공부했던 과목이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이 시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내 마음에 뭔가가 덜컥 내려앉았다. 평범한 단어와 문장인데도 시에 나의 마음과 정신을 확 묶어놓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대합실 차창 밖으로는 소리없이 눈송이가 쌓이고, 승객들은 침묵 속에서 말 없이 기차를 기다린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한줌의 톱밥을 불꽃 속에 적셔두고'....... 이 표현에서 내 마음 역시 시에 젖어들어갔던 것 같다.


시의 화자는 난로에 톱밥을 던져 넣으며 그리웠던 순간들을 돌이켜 본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를 인생 속에서 어차피 낯설음도 뼈 아픈 추억과 고통도 다 설원인데......


산다는 것은 때로 귀향하는 기분으로 저마다 손에 들린 것을 만지작거리며 침묵해야 한다는 것은, 나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가끔 침묵이 열 마디의 말보다 낫다는 것은 요즘들어 조금씩 느끼고 있다.



월요일 화요일 지겹게 내리던 비가 그치고 어느덧 늦가을로 접어들고 있다. 이제 몇 번 더 가을비가 내리면 겨울이 올 것이다. 내 삶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르지만 부끄럽지 않게 살았으면 좋겠다. 나 자신에게 떳떳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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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분간 -나희덕-

2014. 5. 26. 23:28 | Posted by 도유정

오분간

 

나희덕

 


이 꽃그늘 아래서

내 일생이 다 지나갈 것 같다.

기다리면서 서성거리면서

아니, 이미 다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기다리는 오분간

아카시아꽃 하얗게 흩날리는

이 그늘 아래서

어느새 나는 머리 희끗한 노파가 되고,

버스가 저 모퉁이를 돌아서

내 앞에 멈추면

여섯살배기가 뛰어내려 안기는 게 아니라

훤칠한 청년 하나 내게로 걸어올 것만 같다.

내가 늙은 만큼 그는 자라서

서로의 삶을 맞바꾼 듯 마주보겠지.

기다림 하나로도 깜박 지나가 버릴 生,

내가 늘 기다렸던 이 자리에

그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쯤

너무 멀리 나가버린 그의 썰물을 향해

떨어지는 꽃잎,

또는 지나치는 버스를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내 기다림을 완성하겠지.

중얼거리는 동안 꽃잎은 한 무더기 또 진다.

아, 저기 버스가 온다.

나는 훌쩍 날아올라 꽃그늘을 벗어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 중 한 분인 나희덕 시인의 수작이다.

 

사실 시에서는 아카시아 꽃이라고 썼지만, 봄이라서 그런가 나는 읽으면서 벚꽃잎이 봄바람에 흩날려 비처럼 사붓사붓 떨어지는 풍경을 생각했었다.

 

 

 

이렇게 길 양 옆으로 화사하게 만개한 벚꽃이 봄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고, 유치원 간 아이가 타고 올 통학버스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엄마 옆으로 벚꽃잎이 분분히 흩날리는, 아름다운 봄의 한 장면이 마치 사진처럼 내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버스가 오기까지 그 찰나의 시간을, 여섯살 아이가 스무살 청년으로 훌쩍 자라버리는 시간으로 대치한 발상이 너무나 훌륭하다. 나는 아직 아이를 길러보지 않아 잘 모르지만 어머니들은 아이들 자라는 게 정말 금방이라고들 하시더라. 다섯살 여섯살이 엊그제같은데 벌써 교복을 입고 대학에 가고 결혼을 한다고.

 

버스에서 내린 아이가 스무살 훤칠한 청년이 되어 '나'와 마주본다는 시구가 너무 좋았다. '내가 늙은만큼 그는 자라서 서로의 삶을 맞바꾼 듯 마주보겠지.'

나는 내가 자라는 데에만 급급해서 우리 부모님이 나이 드시는 건 생각하지 못했다. 눈 앞에 닥친 학업과 시험, 친구관계에 열중하면서 대학에 가고 졸업을 하는 동안 숱 많던 우리 아빠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듬성듬성 비어있고, 우리 엄마의 머리는 희끝희끝해져 있더라... 내가 크는 만큼 우리 부모님도 어느새 서른, 마흔이 되고 쉰을 넘기시는 것을 곁에 있으면서도 몰랐다.

 

기다림 하나로도 깜빡 지나가 버린 우리 부모님의 생. 그동안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너무 멀리 빠져버린 내 썰물의 빈자리를, 이제 다시 채워야겠다. 내게 준 것보다 더 큰 사랑으로 다시 밀려들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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