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조지 밀러

극본 : 조지 밀러

상영시간 : 120분

총 평점 : ★★★★☆


- 액션 : ★★★★★

- 줄거리 : ★★☆☆☆


한 줄 리뷰 : 구원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리는 파괴적인 마초적 영상미



<스포 주의>

매드 맥스 원작이나 기존 세계관에 대한 어떠한 기초지식 없이, 오직 분노의 도로 영화만 보고 남기는 리뷰임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1. 강렬하고 파괴적인 액션이 선사하는 시청각 쇼크




영화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영화의 가장 큰 강점인 파괴적이고 강렬한 시청각적 유희를 선사하고자 일직선, 단선적인 줄거리 라인을 따라 달리고 또 달린다.


22세기, 핵 전쟁과 자원 고갈로 세계는 멸망했다. 인류는 물과 기름, 식량을 두고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고 살아남은 신인류는 각자 집단을 이뤄 다른 부족을 약탈하고 착취하며 살아간다. 독재자 임모탄은 물과 기름, 식물을 독차지하고 세뇌된 전사 '워보이'를 통해 시타델에서 철혈의 독재를 펼친다. 임모탄은 건너편의 가스 공장과 무기 공장으로 사령관 퓨리오사를 보내 군수물자를 수송하게 하려했으나, 그의 아이를 밴 '부인들'을 데리고 퓨리오사가 탈주했다는 것을 알고 시타델의 전 부대를 출동시켜 퓨리오사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주인공 맥스(톰 하디)는 그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않은 남자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은 모종의 이유로 지켜주겠다 약속했던 가족들을 모두 잃었고,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신을 원망하는 죽은 가족들의 환영에 시달린다. 동시에 황폐해진 땅을 지배하는 시타델의 워보이들에게 사냥당하며 죽은 자와 산 자 모두에게 위협받는 신세다.







초반에 방사능에 노출되어 돌연변이가 된 쌍두 도마뱀을 간지나게 밟아 한 입에 씹어 드시며 카리스마를 발산하나 했더니, 등장 1분도 되지 않아 워보이들에게 사냥당해 '피주머니'로 전락하고 만다.


임모탄의 본부 시타델은 전형적인 피라미드 구조의 독재정이다. 최상위 계층에 철혈의 독재자 임모탄이 있고 그 아래에 방사능에 노출되어 기형이 된 그의 아들들을 비롯한 워보이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최하층 계급에 착취의 대상이 되는 우민들이 있다.


임모탄은 물과 식량을 관리하고 배분하면서 우민들을 다스리고, 시타델의 인류를 쓰임에 따라 분류하여 '사용'한다. 시타델에서 임모탄을 제외하면 누구도 사람으로서 대접받지 못한다. 풍만한 여자들은 '모유 공장'에서 젖을 생산하고, 방사능에 노출되지 않은 건강하고 아름다운 미인들은 임모탄의 씨받이로서 건강한 후계자를 생산해야 한다.






노략당해 끌려온 맥스는 '피주머니'가 되어 암에 걸린 워보이 '눅스'(니콜라스 홀트)에게 산 채로 피를 수혈하게 된다.






맥스가 끌려온 지 며칠 후, 퓨리오사가 임모탄의 아이를 밴 부인들을 모두 데리고 탈주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분노한 임모탄은 시타델의 전 부대를 이끌고 추격에 나서고, 단단히 세뇌된 워보이 중 한 명인 눅스는 임모탄을 위해 제 한 몸을 불살라 천당에 드는 구원을 얻고자 피주머니를 매달고 출전한다.






눅스가 퓨리오사를 추격하는 와중에 차가 폭파되자, 맥스는 한숨 돌리고 있던 퓨리오사 일행을 총으로 위협하여 여정에 동행하게 된다. 죽은 줄 알았던 눅스 역시 몰래 차에 올라타 번번히 위협을 가하지만, 추격 과정에서 임모탄이 가장 아꼈던 부인 스플렌디드가 크게 다치자 마음을 접고 맥스 일행과 함께 하게 된다.


이 영화를 크게 반절로 나누면 임모탄의 추격에서 달아나 퓨리오사의 고향 green place를 향해 가는 여정, 그리고 고향 역시 황폐화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시타델을 접수하기 위해 도로 되돌아가는 여정 이렇게 반반이다.


전반부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희망의 땅 '어머니의 땅'을 향해 가는 여정은 쫓고 쫓기는 긴박한 추격전으로 눈을 뗄 수 없는 재미를 선사한다. 방사능 노출로 머리가 빠지고 피부가 창백한 신인류의 모습, 삐죽한 스파이크를 달고 창을 내던지는 전투 트럭, 화끈한 폭발씬, 드럼과 기타를 치며 퓨리오사를 뒤쫓는 워보이들은 강렬한 시청각적 충격을 제공한다.





매드맥스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인 빨간내복 기타맨ㅋㅋㅋㅋㅋ


처음에 임모탄이 출정할 때 선두에 서서 일렉기타를 쉴 새 없이 연주하는데, 황무지와 회색빛 자동차 사이에서 빨간색 옷을 입고 불이 뿜어져 나오는 기타를 연주하는 장면이 단연 눈에 띈다. 마치 그 옛날 오스만 투르크의 용맹한 군대가 출정할 때 군악대 메흐테르가 호전적인 행진곡을 연주하며 사기를 드높였던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










매드맥스는 시각적 자극의 끝을 보여준다. 거의가 황폐한 사막인 단순한 배경 위에서, 갖가지 특색을 띈 자동차들이 쉴 새 없이 질주하며 호시탐탐 서로를 노린다. 장대 끝에 매달려 창과 갈퀴를 들고 내다 꽂고 폭탄을 투하하며 화염방사기를 거침없이 난사해댄다. 곳곳에서 자동차가 뒤집히고 폭발이 일어나며 총과 전기톱, 칼이 등장한다. 그 모든 장면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 크게 뜨고 보고 있노라면, 호전적인 드럼 소리와 강렬한 일렉 기타 사운드가 지속적인 청각적 자극을 선사한다.


이토록 단순하고 직선적인 줄거리임에도 이 영화는 단 한 순간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인간은 자극에 빠르게 익숙해지는 동물이다. <킬 빌>과 <300>의 초반부에서 난무하던 신체 절단과 살인의 강렬한 자극도, 중반부로 가면 평이한 일상처럼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지만 매드맥스는 영화의 도입부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초반의 강렬했던 자극이 시들해지는 바 없이 쭉 이어진다. 배경의 변화, 특색이 뚜렷하게 다른 무기와 자동차, 인물들로 결말부에 치닫는 그 순간까지도 영화는 액션 영화의 긴박한 자극을 끝까지 유지한다.




2. 구원(redemption)



이러한 마초적이고 강렬한 쇼크를 선사하는 파괴적인 액션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는 우스우리만큼 순진하고 순수하다.


바로 '구원'(redemption)이다.


임모탄의 후계자를 생산하는 '부인'으로서, 다섯 명의 첩들은 부족함 없는 생활을 누려왔다. 그들은 우민들처럼 물과 식량의 절대적인 궁핍으로 고통받지 않았고, 워보이들처럼 전투와 노략에 앞장서지 않았으며, 물을 긷고 기계를 돌리기 위해 노동에 혹사된 적도 없었다. 자유와 '인간성'만이 결핍되었을 뿐 남부럽지 않던 생활을 하던 고운 여자들이 퓨리오사를 믿고 그 위험한 여정에 동행한 동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퓨리오사를 따라 풀이 우거진 어머니의 땅으로 가면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퓨리오사와 달리, 여자들은 그곳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지만 그 땅에 다다르면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라는 실체 없는 희망을 품고 있다.


워보이들이 죽음도 불사한 채 불나방처럼 전쟁에 목숨을 바치는 행동 또한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이 현실이 지옥임을 그들 모두 알고 있다. 모두가 미친 세상, 그들의 교주와도 같은 존재 임모탄을 따르면 내세에서는 천당에 들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실체없는 환상과 희망에 대한 갈급이 워보이들을 내모는 원동력이다. 임모탄의 의미 없는 시선과 알맹이 없는 구원에의 약속 그 의미 없는 껍데기를 위해 눅스는 몇 번이고 목숨을 초개처럼 바치려 했다.


퓨리오사 또한 마찬가지다. 어렸을 적 어머니와 함께 납치되어 시타델에 끌려간 이후, 고향의 푸른 땅에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악착같이 버텨 신임을 얻고 사령관의 지위에 올랐다. 이 모든 지옥이 오직 고향에 돌아가기만 하면 해결된다는 막연한 구원에의 갈망으로 퓨리오사는 목숨을 건 대탈주극을 벌였다. 때문에 7000일이 넘는 아득한 시간 동안 굳게 믿었던 희망의 실체가, 이미 황폐화된 지 오래라는 것을 깨닫고 그토록 절망하고 좌절했던 것이다. 이후 맥스의 도움으로, 퓨리오사와 일행은 시타델이 새로운 그린 플레이스가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목숨을 걸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맥스는 뼈아픈 경험으로 희망을 가지면 절망한다는 비관적 신념을 가진 인물이다. 초반에는 의지와 상관없이 납치당했기에 살기 위해 퓨리오사와 함께 하지만, 그린 플레이스에 도착한 이후부터는 자신의 의지로 퓨리오사를 돕는다. 다른 등장인물들처럼 실체없는 희망과 구원에 목마른 모습을 대놓고 보여주지는 않지만, 소금사막으로 떠나는 퓨리오사의 일행을 지키지 못한 자신의 가족과 겹쳐보며 그들과 자신을 구원하기로 스스로 결정한다.



3. 그럼에도 아쉬운 스토리의 한계


그럼에도, 이 모든 강렬한 마초적 액션과 시청각 쇼크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스토리에서는 아쉬운 한계점이 몇가지 존재한다.


첫째, 퓨리오사 일행의 시타델 접수는 혁명이 아닌 쿠데타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퓨리오사의 시타델 입성과 임모탄 체제의 붕괴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아니다. 진정한 임모탄 독재체제의 붕괴를 보여주려 했다면 <헝거게임 캐칭 파이어>에서처럼 주인공의 행동으로 촉발된 민중의 봉기가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시타델에서 우민으로 그려지고 있는 대중은 이번 체제 붕괴의 주연이 아니었고, 때문에 시타델 접수는 쿠데타에 불과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이 경외하는 대상이 임모탄에서 퓨리오사로 바뀐 것 뿐, 그들은 여전히 굶주리고 절대적인 힘에 복종하는 우민일 뿐이며 따라서 제 2의 임모탄이 등장할 여지가 너무나도 많다.






둘째, 교조화되었던 임모탄의 철옹성이 무너지는 과정이 너무 부실하다.


시타델의 최하층 대중들은 우민으로 그려지는데, 임모탄이 선심쓰듯 배급하는 식량과 물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워보이로 대표되는 힘의 압제 앞에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수동적 존재다. 워보이 역시 마찬가지로, 비록 중간 계층에서 임모탄의 검이 되어 전투에 앞장서지만 뼛 속 깊이 임모탄의 교조화 사상에 세뇌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오직 임모탄 님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으며, 임모탄을 위해 분노의 도로에서 영예롭게 죽는다면 내세에는 천당에 들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따라서 세계 2차 대전 일제의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처럼 죽음과 고통을 도외시하고 불나방처럼 적을 향해 돌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세뇌는 태어났을 때부터 행해진 것으로, 단지 교주로 대표되는 임모탄 개인의 죽음으로서 쉽게 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워보이들은 임모탄을 필두로 하는 시타델 교조 체제의 한 축을 굳건히 이루고 있었으며, 그 아래에서 온갖 노동을 담당하는 노약한 워보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타델을 이루는 체제는 곧 그들의 알이며, 세계이고 세상의 전부다.


이러한 점에서 눅스가 임모탄을 위해 몸 바칠 수 있었던 세 번의 기회에서 모두 실패하고 퓨리오사의 편이 되는 점은 다소 억지스러운 면이 있었다. <데미안>에서는 새가 그의 세상의 전부였던 알을 깨고 세계로 나오기 위해서는 엄청난 고통을 수반해야 한다고 말한다. 과연 눅스는 아프락사스의 새가 될 만한 성장통을 겪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세 번의 실패로 낙담하여 삶의 의지를 잃은 눅스를 임모탄의 부인 중 한 명이 위로해주었다고 해서, 바로 그토록 신봉하고 우상시했던 임모탄을 거리낌없이 대적하는 부분은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또한 퓨리오사 일행이 시타델로 입성해서 임모탄의 시체를 내던졌을 때, 우민들은 Let them up을 외치며 그들의 입성을 한 목소리로 요구했고, 노약한 워보이들은 무서운 집행자들을 제치고 손수 그들을 위로 끌어올렸다. 퓨리오사 일행이 돌아왔을 때에도 그들은 '사령관이 돌아왔다'며 임모탄 체제 하에서의 명칭으로 퓨리오사를 불렀다. 임모탄의 죽음을 확인하기 바로 직전까지도 그들은 임모탄과 워보이들을 극히 두려워하는 수동적 존재에 불과했다. 그랬던 그들이 단지 임모탄의 죽음을 눈으로 확인했다고 해서 바로 적극성을 띠며 퓨리오사 일행을 반기는 것은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있다. 만약 아무도 감히 임모탄의 시체를 건들 생각을 하지 못하고 주춤거릴 때, 우민들 중 한 명이 용감하게 나서서 그의 시체에 손을 대거나 모욕하고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두려움에 주춤대던 나머지가 용기를 얻어 임모탄에게 달려드는 장면이 나왔다면 체제 붕괴의 과정이 약간은 설득력을 지녔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기다렸다는 듯 모두가 우르르 몰려들어 임모탄의 시체를 약탈하고, 위에서 노동을 하며 내려다보던 노약한 워보이들이 퓨리오사 일행을 끌어올리며 체제 붕괴에 급작스레 손을 보태는 것은 다소 억지스러운 설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영화 맨 마지막 제작진의 메시지에서도 나타난다.


“Where must we go, we who wander this wasteland, in search of our better selves.” 희망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위해 나아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The First History of Man 최초의 인류.


단선적인 스토리 라인을 통해 호쾌하고 강렬한 액션을 메인으로 선보이다가, 결말부에 급작스럽게 신인류의 봉기를 보여주며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던 제작진의 의도는 너무나도 작위적이었다.





셋째, 여성들이 마초적 남성성의 부차적인 존재로 그려지는 마초이즘이다.  


한 줄 리뷰에서도 썼듯이,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마초적인 영화임을 상영시간 내내 내지른다. 마초적이라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본래 마초라는 것은 기존의 '남성미'라는 관념이 크게 돋보이는 가리키는 말이었고, 근래에 들어 가부장주의와 결합되며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니까.


내가 아쉬웠다고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른 외국 흥행 영화-특히 액션과 스파이물-에서도 당연하게 나타나는, 남성의 부차적인 존재일 뿐인 여성성의 존재다.


본드걸이라는 말이 있다. 유명한 스파이물 007 시리즈에서, 주인공 제임스 본드를 유혹하고 때로는 그를 위험에서 구하면서, 결국에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본드의 트로피와 같은 존재로 표현되는 섹시한 여성들. 이러한 본드걸의 존재는 트랜스포머를 비롯한 흥행 영화에서 늘 주인공을 빛내주는 조연적 역할로 등장해왔고 매드맥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맥스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퓨리오사는 성별로만 따지면 당연히 여자다. 그러나 그녀의 사회적 성, gender 역시 여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녀의 sex는 여성이지만, 그녀의 gender는 분명 남성이었다. 여자지만 누구보다도 남성적인 퓨리오사는 아름답고 섹시한 임모탄의 부인들과 달리, 머리도 남자처럼 짧게 자르고 옷차림도 군인 그 자체이다. 젊고 강한 워보이들과 대적하면서도 전혀 뒤지지 않고, 마지막에 임모탄을 직접 끝장내기도 했다. 퓨리오사는 여자였지만 누구보다도 마초적이고 남성적인 존재였다.






임모탄의 부인들은 그러한 남성성에 기대고 의존하는 부차적인 존재들이다. 신랄하게 말하자면, 우아하고 섹시한 짐덩어리들이다. 개중에서 무기를 다룰 줄 아는 여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총에 탄환을 끼울 줄도 모르고 마초적이고 피 튀기는 전투 속에서 이렇다 할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임모탄의 시타델 체제 하에서도 그들의 역할은 씨받이와 모유 공장 등 제한적이고 '보호 받아야 하는' 임무에 한정되어 있었을 뿐이다. 심지어 부인들 중 한 명은 차라리 이럴 바에야 임모탄에게 돌아가 임모탄이 제공하는 안락과 보호를 누리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교조화된 체제에서 보호받고 자란 첩의 설정 상 자연스러운 주장이었지만, 여성성은 수동적이고 부차적인 존재로 그려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영화의 세계관 자체가 자원과 물의 절대적 부족, 방사능 피폭 등으로 힘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미친 세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여성성이 등장할 여지가 별로 없다는 것은 나 역시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제작진의 마지막 메시지 등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가, 궁극적으로 '인류의 희망과 구원'임을 생각해 볼 때 여성성의 한정된 역할이 아쉬웠다고 말할 여지는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4. 하지만 파괴적인 영상미와 강렬한 시청각 자극만큼은 감히 견줄 수 없다.



이러한 스토리 상의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액션 영화사에 길이 남을 점 하나를 찍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쇼크에 가까울 만큼 파괴적이고 강렬한 영상미와 마초적인 전투, 시청각적 자극은 그 어떤 액션 영화도 쉬이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온갖 인스턴트적 자극에 익숙해진 관객을 120분의 상영시간 동안 눈조차 뗄 수 없게 만드는 매드맥스의 흡입력과 액션의 호쾌함은 단연 최고라 일컬을 만하다.


반드시 영화관에서 보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