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에 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 리뷰 : 부모와 자식의 '당연스러운' 관계에 낯선 질문을 던지는 한 가족의 비극사
2016. 1. 23. 21:58 |
We need to talk about Kevin
감독 : 린 램지
배우 : 틸다 스윈튼(에바), 이즈라 밀러(케빈), 존 C. 레일리(프랭클린)
장르 : 드라마, 스릴러, 서스펜스
상영시간 : 112분
별점 : ★★★★☆ (3.75)
한줄 평가 : 모성애란 무엇인가? 부모와 자식의 '당연스러운' 관계에 낯선 질문을 던지는 한 가족의 비극사
우리는 일반적으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리이며, 특히 아이를 10달동안 뱃속에 품었던 엄마의 모성애는 더 강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순리일까? 모성애는 어느 순간에도 발휘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일까? 그 어떤 자식이라고 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엄마는 자식을 사랑해야 하는가?
악인은 만들어지는 것일까 타고나는 것일까?
여기 한 가족이 있다. 자식을 사랑하지 못했던 엄마와, 그런 엄마를 증오한 한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각자의 답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케빈에 대하여
영화의 주인공은 엄마 Eva와 아들 Kevin 두 사람이다. 이 영화는 시작부부터 스페인 토마토 축제의 강렬한 붉은색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는데, 영화 내내 두 주인공의 불편한 어긋남과 스트레스는 기묘한 배경음악과 붉은색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Eva는 자유와 여행을 즐기는 여행가였지만 스페인 토마토 축제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의도치 않게 임신을 하게 된다. 애 아빠이자 남편이 된 프랭클린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해 이것저것 물건을 사오는 등 Eva의 임신에 행복해하지만, Eva는 자신의 임신이 낯설고 떨떠름하다.
Eva는 아들 Kevin을 낳았지만 전혀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또 다른 주인공인 아들 Kevin. 엄마를 악의어린 표정으로 노려보며, 케빈의 마음을 열어보려는 엄마의 그 어떤 시도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엄마는 그런 케빈을 사랑하지 못한다.
1. 한 인간으로서의 감정과 모성애
최근 산후우울증으로 자녀를 학대하는 엄마들의 소식을 뉴스를 통해서 듣는데, 아이가 개인적인 고통이나 스트레스의 기억과 연결되면 아이를 보는 것 자체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아이들을 사랑하지 못하거나 학대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었다. 케빈을 낳은 에바의 표정을 보며 그 기사가 떠올랐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원치 않았던 임신, 그리고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던 출산.
나는 여기서부터 이 두 母子의 비극이 잉태되었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는 Eva라는 한 인간으로서의 감정과, 엄마라는 존재로서 가져야 하는 모성애가 상충되는 순간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먼저 한 인간으로서의 Eva를 보자. Eva는 여행을 사랑했지만, 아이를 가진 후로 엄마와 아내로서의 의무 때문에 이제는 자유로이 여행을 다니지 못하게 된다. 또 아이를 위해 좋다는 남편의 주장에 못 이겨 사랑하는 뉴욕을 뒤로 하고 한적한 교외의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간다. Eva로서는 아이가 자신의 커리어와 사랑하는 터전을 빼앗은 셈이다.
또 그렇게 힘들게 낳은 아이는 자신과 전혀 맞는 것 같지 않다. 아무리 안고 달래도 내내 울면서 아빠가 오자마자 울음을 뚝 그친다. 때문에 남편 프랭클린은 케빈이 얼마나 까다롭고 힘든 아이인지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함께 놀이를 하려고 해도 전혀 엄마인 자신에게는 반응을 해주지 않는다. 자라면서는 항상 뾰로통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아이의 적의에, Eva는 화를 참기 힘들 때도 있다.
갓난아기 시절 아이의 울음소리가 듣기 싫었던 에바는 땅에 드릴을 뚫고 있는 공사판 옆에 유모차를 대고 서있기까지 했다.
아이가 울어댈 때마다 자신이 '엄마'로서 비난받는 것 같다고 느꼈을까? 아니면 그저 그치지 않는 울음소리에 너무나도 지치고 질려 차라리 공사소음이 낫겠다는 한 인간으로서의 스트레스였을까?
또 기저귀를 갈자마자 보란듯이 자신을 쳐다보며 또 다시 새 기저귀에 똥을 싸는 아이를, 기저귀 테이블 위에서 집어던져 케빈의 팔이 부러지기도 했다.
그런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도 놀란 Eva는 집으로 오는 차 안 케빈에게 사과를 하지만, 케빈은 듣는둥 마는둥한다. 하지만 정작 아빠가 왜 팔이 부러졌냐고 묻자 자신이 놀다가 실수로 부러졌다고 대답한다. Eva는 그런 케빈의 대답에 안도하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러한 장면에서, 자신이 '엄마'로서 부족한 사람이며 남들이 바라보는 일반적인 엄마와 자식 관계에 부합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싫은 Eva의 두려움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나중에 함께 얘기를 할 때 친구들이 답답했던 것이, 남편이 믿어주지 않으면 CCTV 등으로 녹화를 해서라도 케빈의 행동을 남편에게 보여줬어야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본인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면 남편과 상의를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Eva는 남편에게 자신이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엄마라는 것을 인정하고 드러내기 싫었던 것이고, 또 그런 자신에 대해 다정한 남편이 어떻게 반응할지 두려워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Eva가 남편에게 케빈에 대해 어렵게 말을 꺼낼 때마다, 남편 프랭클린은 '사내애들은 다 그래.' '애들은 그러면서 크는 거야. 그게 애들이지.' 라며 Eva의 말에 공감을 해주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프랭클린의 시선은 일반적인 대중의 인식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애들이 영악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날 때부터 사악한 아이는 없다, 사고치는 짓궂은 아이 때문에 힘들어하는 엄마가 한둘인가 하는 생각. 또 설사 아이가 그렇다 하더라도 엄마는 자식을 사랑해야한다는 당연스러운 모성애에 대한 관념이 그것이다.
Eva 자신조차도 그러한 '모성애'에 대한 관념이 익숙했기 때문에, 케빈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나중에 낳은 딸 실리아도 의도치 않은 임신으로 가진 아이였지만, Eva는 케빈과는 달리 실리아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에 대해서 실리아가 케빈과는 (엄마에 대한) 행동 자체가 다르기도 했지만, '정상적인' 부모 자식 관계에서 실리아를 통해 자신이 제대로된 엄마임을 확인받고 보상받았던 것은 아닌가 싶었다. 케빈에게 Eva는 스스로가 늘 부족한 엄마였지만(자식을 사랑하지 못하는), 실리아에게만큼은 부족하지 않은 엄마였던 것이다.
한편 늘 자신에게만 적의를 보내오는 아이에 대해, 엄마는 그럼에도 모성애를 가져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사람은 대부분 자신을 한결같이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지 못한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기방어기제가, 부모 자식 관계의 특수성 안에서는 적용될 수 없는가?
이에 대해 나 자신도 인간으로서 케빈의 행동을 미워할 수는 있지만, 엄마로서는 케빈을 그럼에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한 인간으로서의 Eva와 엄마로서의 Eva가 모두 같은 사람이라는 점이다.
여담이지만 케빈을 맡은 아이들이 어찌나 비슷하게 생겼는지 사진을 보고 빵 터졌다. 엄마 EVA를 노려보는 그 기분나쁜 눈빛, 뾰로통한 표정이 한결같다. 그런데 지금보니 Eva의 표정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차가운 눈빛, 불쾌하게 다물린 입술. 두 사람의 비극은 쌍방과실이었다고 생각한다.
2. 싸이코패스 케빈- 타고난 악인인가 아니면 만들어진 악인인가?
케빈이 싸이코패스, 즉 반사회적 인격장애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케빈은 아빠와 여동생 실리아를 집에서 살해한 후, 학교에 자전거용 자물쇠를 걸어잠그고 학생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화살을 쏘아 죽였다. 범행 후 케빈은 마치 올림픽 선수가 환호하는 관객들에게 답례하듯 우아하게 활을 들어 인사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경찰이 자물쇠를 부쉈을 때도 여유만만하게 미소를 띄고 걸어나온다. 자신의 범행이나 행동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이나 고통을 보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러나 모든 싸이코패스가 악인은 아니듯, 나는 싸이코패스인 케빈을 범죄자이자 악인으로 만든 데에는 Eva와 케빈의 관계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Eva의 임신이 원하지 않은 것이었고 임신을 반기지 않았다는 것은 영화에서 여러 장면을 통해 나타난다. 산부들이 다니는 요가 클래스의 탈의실에서, 다른 엄마들은 모두 행복한 표정으로 즐겁게 배를 쓰다듬으며 옆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지만 Eva는 머뭇거리다 결국 짐을 싸서 나가버린다.
아이가 자라면서도 Eva는 아이를 사랑하려고 노력했지만, 엄마에게만 비협조적이고 악의적인 눈빛을 보내는 케빈을 결국 사랑하지는 못한다.
중간에 이런 장면이 나오는데, 기저귀를 차고 앉아있는 케빈을 향해 스트레스가 가득 차 있던 Eva는 '네가 태어나기 전에 엄마는 더 행복했다. 엄마는 너만 아니었다면 지금 프랑스에 있었을 거고,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했을 거야'라고 말한다. 때마침 퇴근해서 들어왔던 남편이 그 장면을 보고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방을 나가버린다.
영화를 보며 처음에는 Eva가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친구들과 토론하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Eva는 그저 부모로서 해야하는 의무적인 보살핌을 줬을 뿐, 아기가 자라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랑을 주지 않았다. Eva는 케빈이 뱃속에 있었을 때부터 케빈에게 지속적인 정서적 학대를 가했다. 영화를 보면 갓난아이인 케빈이 울어댈 때도 팔을 쭉 뻗어 아이를 흔들 뿐, 아기를 안아주지 않는다.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 아이를 앞에 앉혀두고 너만 없었다면 엄마는 더 행복했을 거라는 말도 한다.
유아교육학을 전공한 친구가 했던 말이 있다. 아이에게 있어 가장 큰 불행은 자신은 부모가 원하지 않는 존재라는 말을 직접 듣는 거라고.
케빈은 Eva가 그 말을 하기 전부터, 자신이 잉태된 그 순간부터 자신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부정당하고 외면당했다.
아기는 본능적으로 누가 자신을 사랑하고 누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지를 아는 존재이다. 뱃속에서부터 자신을 반기지 않고 사랑하지도 못했던 엄마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아기를 사랑하지 않은 엄마, 엄마에게 사랑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은 아이. 둘의 어긋나고 비틀린 관계는 닭과 달걀의 관계처럼, 누구의 잘못이 먼저인지를 따지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
"익숙한 거랑 좋아하는 거랑은 달라. 엄만 그냥 나에게 익숙한거야. " -케빈
케빈은 엄마 Eva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며, 그저 자신에게 익숙해져있는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또 동생 실리아가 태어났을 때 케빈의 반응을 주의깊게 볼 필요가 있다. 사랑스럽다는 듯 아기를 안고 어르는 엄마를 지켜보던 케빈은 어항에 손을 담가 일부러 물을 아기에게 뿌린다. 엄마 Eva는 그런 케빈을 야단친다. 맛있는 과자를 먹자며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를 달래주는 것은 아빠 프랭클린이다.
케빈은 엄마가 대하는 것이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차라리 비교대상이 없었다면 엄마가 '나에게만' 사랑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여동생 실리아에게 Eva는 모성애를 보이며, 그로부터 케빈이 어떠한 정서적 박탈감을 느꼈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한 부분이다. 평범하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 아래에서도, 동생이 태어나면 첫째가 일부러 더 아기짓을 하거나 관심을 끌기 위해 사고를 치는 행동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동생으로 인해 자신이 받던 사랑을 뺏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물며 케빈은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한 데에 반해 실리아는 태어난 순간부터 엄마의 사랑을 자연스레 받는다.
실리아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케빈은 앓아 눕게 되는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다. 아파서 늘어져있는 케빈을 안고 침대로 데려간 엄마에게 기대 누워, 엄마가 읽어주는 로빈훗 동화책을 행복하게 듣고, 아빠가 퇴근해서 찾아오자 아빠에게 적의를 보이며 나가라고 한다. 엄마는 놀라지만 한편으로는 케빈이 드디어 마음을 여는가 싶어 행복하다.
그러나 다음날 케빈이 낫자마자 케빈의 태도는 도로 돌아오고 엄마 Eva는 허탈함과 실망을 느껴버린다.
이 장면에 대해, 내 친구들은 케빈이 엄마를 더 괴롭히기 위해 일부러 엄마를 좋아한 척하다 다시 원래 태도로 돌아간 것이라고 해석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사람은 몸이 아플 때 날을 세웠던 방어기제를 내리고 자신의 약한 부분을 드러내게 된다. 아픈 케빈은 '나는 엄마와 행복하지 않다'는 날선 방어기제를 내려놓고 사실은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본연의 솔직한 욕구에 충실했던 것이다.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보살피는 엄마에게 기대 엄마의 사랑을 즐기면서. 또 한편으로는 실리아가 태어났다고 해서 자신이 버림받지 않는다는 확신도 필요했던 것 같다.
세번째로, Eva가 이사온 집 자신의 방을 세계지도로 꾸몄을 때 케빈이 지도를 싫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는 이 장면 역시 엄마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었던 케빈의 내면이 드러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Eva가 동경의 눈빛으로 자신의 방을 채운 지도를 바라볼 때, 케빈이 구불구불한 선 따위가 뭐가 좋냐며, 바보 같다고 한다. Eva가 잠시 전화를 받으려고 자리를 비웠다 다시 돌아오자, 방은 케빈이 물감을 채운 물총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고 Eva는 화를 못 이겨 케빈의 앞에서 물총을 발로 밟아 부숴버린다.
이 장면도 케빈이 엄마를 지독하게 괴롭히는 씬의 하나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나는 케빈에게 있어 '구불구불한 재미없는 선'은 엄마의 애정을 빼앗아 가버린 어떤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늘 자유와 여행을 동경한 엄마, 그리고 너만 아니었으면 엄마는 지금쯤 프랑스에 가서 행복했을 거라던 말에서 엄마는 나를 원하지 않았고 나보다 여행을 더 사랑한다고 느껴 엄마가 여해을 그리워하는 것 자체를 싫어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마지막으로 금요일 데이트 장면도 마찬가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Eva는 16살 케빈과 함께 외출을 하는데, 미니골프를 치고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으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케빈은 한겨울에 반팔 차림으로 나오는 삐딱한 행동으로 처음부터 Eva의 심기를 거스른다. 골프장 프론트에서 등록을 하는 도중, Eva는 뒤쪽의 벤치에 앉아 정크푸드를 먹는 사람들에 대해 차갑게 험담을 한다.
"살 찐 사람들이 물만 마셔도 살찐다는 말은 다 핑계야. 저것봐. 저렇게 좋지 않은 음식을 계속해서 먹어대면서 살이 찐다고 투덜대지. 그냥 저 사람들은 좋지 않은 음식을 먹고 게으른 것 뿐이야."
그 말에 대해 케빈은 '가끔 엄마, 남에 대해서 굉장히 막말하는 거 아느냐'고 묻고 Eva는 너도 나에게 막말을 하지 않느냐고 차갑게 대꾸한다. 그 후 둘은 서먹한 분위기에서 골프 한 게임을 치고 케빈이 공을 홀에 넣자마자 네가 이겼다며 깃발을 꽂아버리고는 먼저 차로 돌아가버린다.
이 장면에서 나는 Eva가 케빈의 적대적인 배척에 의한 피해자만은 아니라는 것과, 케빈에게는 늘 엄마가 '그런 식'으로 자신에게 막말을 하는 것처럼 느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Eva는 너가 태어나기 전 엄마는 훨씬 더 행복했단 말을 어린 케빈에게 했던 적이 있었다. 그 후로도 비록 말로 표현을 하지 않았을지언정, 비언어적 표현을 통해 케빈이 엄마에게 자신은 편한 존재,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느끼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케빈이 뱃속에서부터 엄마의 의무적인 사랑이 아닌, 가슴에서부터 끌어오르는 '모성애'를 받지 못했다는 부분, 케빈이 엄마에게 애정의 부산물이 아닌 짐처럼 느껴졌다는 부분, 또 실리아와 케빈을 대하는 엄마의 사랑이 달랐고 그것을 케빈이 목도하며 자랐다는 점 등 엄마 Eva의 정서적 학대와 외면이 케빈을 악인 범죄자로 만드는 데 어느정도 일조를 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케빈의 범죄와 체포를 보고 돌아오는 Eva를 비춰주며, 이 노래가 나오는데 가사가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I'm nobody's child, I'm nobody's child
I'm like a flower just growing wild
No mommy's kisses and no daddy's smile
Nobody wants me, I'm nobody's child
나는 이 노래야말로 케빈의 주제곡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누구의 아이도 아니에요. 나는 야생에서 자라나는 꽃과 같죠. 엄마의 키스도, 아빠의 미소도 없어요. 누구도 나를 원하지 않고, 나는 누구의 아이도 아니에요.
(가사 전체 : http://lyrics.wikia.com/wiki/Lonnie_Donegan:Nobody's_Child 참고)
영화를 보다보면 케빈이 그러한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결정적 계기가 나온다. 실리아가 한쪽 눈을 실명한 사건으로 결국 소원해진 프랭클린과 Eva가 '일단 학기가 끝난 후 (이혼을) 해치워버리자'는 이야기를 케빈이 오해한 것이다.
두 부부가 케빈에게 제대로 해명을 했더라면 며칠 후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케빈은 부모가 자신을 '해치울' 거라고 오해하고, 버림받기 전에 버리겠다는 결심으로 범행을 계획했던 것 같다.
케빈이 아빠 프랭클린을 사랑했을까에 대해서는 나도 확신이 없다. 아빠와 잘 어울리고 아빠 앞에서는 얌전하고 착한 아들 노릇을 했지만, 그것이 엄마를 약올리기 위한 쇼였을까, 아니면 자신을 사랑해주는 아빠에게 일말의 애정 정도는 존재했을까?
아빠를 사랑했다면, 그랬기 때문에 자신이 버림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더 크지는 않았을까?
싸이코패스라고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고통이나 아픔에 공감을 못하는 것일 뿐, 자신의 아픔이나 감정에 대해서는 굉장히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케빈이 싸이코패스라면 얼추 들어맞는 해석이 아닐까? 사랑했던 아들에게 배신당해 죽는 아빠의 고통보다, 자신이 버려질 것이라는 두려움과 고통에 집중해서 버림받기 전에 버린다는 결심으로 행한 끔찍한 범행.
나는 저 장면에서도 케빈이 여전히 사랑을 갈구했지만, 끝내 배신당했다고 생각해 모든 것을 끝장내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3. 모성애는 당연한 순리이며 의무인가?
하지만 엄마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자신에게 늘 비협조적이고 보란듯 자신만을 싫어하는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모성애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일까?
케빈은 엄마를 괴롭히기 위해 일부러 증오하는 엄마를 뺀 모든 대상을 죽였다. 엄마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파괴한 것이다.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이, 그리고 무고한 학생들을 죽임으로써 엄마 Eva는 홀로 마을 사람들의 적의를 감당해내야 했다. 길을 가다 뺨을 맞기도 하고, 집과 차에는 새빨간 페인트가 뿌려져있기도 하다. 죄인처럼 마트에서 식료품을 사다가도 사람을 피해 도망다니고, 일부러 깨놓은 계란을 사가서 달걀껍질이 씹혀 나오는 스크램블 에그를 의무처럼 씹어 삼킨다. 그녀가 사랑한 모든 것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이런 고통을 감내해야할만큼, Eva가 잘못한 것일까? 엄마로서 자녀에게 애정을 주지 못했다는 것, 그것이 그렇게 큰 죄였을까?
부모로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지만, 과연 사랑이 이성으로 조절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인가? 만약 부모가 자식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부모의 원죄가 되는 것인가?
극한상황에서 모성애와 자기보호본능이 충돌할 때 과연 사람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한 끔찍하면서도 유명한 실험이 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가 유태인 수용소의 엄마와 아들에 대해 한 실험과 일본 731부대의 실험이 바로 그것이다.
첫번째 나치의 실험에서 나치는 바닥에 철판을 깔고 사방에 유리를 두른 통 안에 자신의 아기를 안은 유태인 여성을 맨발로 들여보냈다. 그리곤 철판바닥 아래에 서서히 열을 가하면 철판이 달아올라 발바닥이 짓무르다 못해 타들어간다. 견딜 수 없이 방이 뜨거워지자 결국 엄마가 아이를 밟고 그 위에 올라섰다고 한다.
두번째 일본의 731부대 실험에서도 아이와 엄마를 한 방에 넣고 계속해서 물을 채워넣었을 때, 결국 엄마가 아이를 밟고 올라서 숨을 쉬었다.
끔찍하지만 극한의 상황에서 모성애가 자기보호본능을 이기지 못했다는 결과이다.
아이를 가질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Eva에게, 갑작스러운 임신은 자신의 세상을 완전히 뒤바꿔버린 큰 사건이었고 그러한 상실의 아픔으로 모성애를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Eva
가 케빈을 사랑할 수 없었다고 해서 케빈을 방치하거나 신체적으로 학대하지도 않았다. Eva는 나름대로 케빈의 마음을 열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에바의 노력이 자녀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모성애가 아닌 것일까? 모성애의 범위는 어디부터 어디까지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일까.
이 가족의 비극사를 지켜보며,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부모 자식 관계와, 모성애라는 것에 대해 낯선 시선으로 다시 한 번 의문을 던져볼 수 있었던 영화였다.
케빈이 싸이코패스가 아니었다면 더 신선하고 좋았을 것 같지만, 만약 그랬다면 이 영화가 주는 메세지와 물음표가 극대화되지 못했을 것 같기도 하다.
케빈은 "그곳에서는 행복하냐"는 엄마의 질문에, "내가 언제는 행복했던 적이 있었던가?"하고 대답했었다. 엄마와의 어긋난 관계속에서 케빈 역시 순수히 가해자로서 남을 수만은 없었다는 뜻이다. 케빈도, Eva도 모두가 불행했다.
"왜 그랬냐"는 마지막 질문에, 이제 곧 성인 교도소로 이감되는 케빈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지금까지는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라고 대답한다. 이 결말에 대해 나도 아직은 명확히 해석이 되지는 않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두 모자의 관계가 조금은 변하지 않았을까 하는 희망적인 생각을 품었다. 엄마 Eva는 케빈의 옷을 정성스레 빨고 다려 옷장에 넣어놓고, 케빈이 다시 돌아올 것처럼 침구를 깔끔하게 정돈한다. 케빈 역시 그동안 몇 번의 면회 동안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눈을 들어 엄마와 드디어 마주 본다. 그것은 Eva도 마찬가지다. 케빈이 열 손가락 손톱을 모두 물어뜯을 때까지 어색하게 비껴앉아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마지막에서는 어색하게 양 팔을 들어 케빈을 꽉 끌어안는다. 두 모자 사이에서 처음으로 감정이 통한 부분이라고, 개인적으로 해석했다.
케빈이 출소한 후에는 케빈도, 엄마 Eva도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드디어 마음을 연 케빈이 Nobody's child가 아닌 Eva's child로서, Eva는 Kevin's mother로서, 드디어 서로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면서.
Good day, Kevin. Be happy, Eva.
+) 영화에 대한 해석과 분석이 잘 되어있는 글을 발견해서 링크합니다. 한 번 읽어보세요.
1.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umorbest&no=949996
2. http://blog.naver.com/willbefree/140164998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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